6·25전쟁은 제주 관악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온 계기였다.
당시 제주도는 가장 안전한후방기지로 인식되었다. 1950년 10월 유엔군의 지원으로 서울 수송동에 민간 보육원으로 설립된 한국보육원이 제주로 본거지를 옮겼다. 같은 해 12월 중공군의 참전에 따라 1•4후퇴를 앞두고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 철수를 결정함에 따라 고아 1,000여명이 중공군의 포로가 될 위협에놓인 것이다. 주한미군 제5공군의 헤스 대령이 주도한 ‘장난감 자동차 작전’ 덕분에 C-47 수송기 15대에 나눠 탄 907명의 원생들이 제주에 무사히 도착했다. 유인자여사도 이때 함께 제주에 도착했다. 제주농업학교 교정(현재의 LH한국토지주택공사 제주지사)의 폐건물에 자리 잡은 한국보육원은 1955년 12월 서울 휘경동으로 돌아갈 때까지 제주관악 역사의 큰 획을 그었다. ‘클라리넷 소녀’ 사진은 지금도 제주국제관악제 조직위원회 사무실에 걸려있다. 볼 때마다 제주 관악의 뿌리를 떠올리자는 취지에서다.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한국전쟁 직후 전쟁고아들로 구성된 한국보육원을 방문했을 때 환영음악을 연주하던 장면이다. 현재 국가기록원이 보유한 사진은 2009년 제주도가 발간한 ‘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(1990-2006년)’에 실리면서 눈길을 끌었다. 유인자 여사도 다른 전쟁고아들과 함께 군용기를타고 제주에 도착했다. 한국보육원에는 고아 1,000여명이 거주했는데 이 가운데 40명이 밴드부원으로 활동했다. 그에게 클라리넷이라는 악기를 선물한 것도 길버트 소령이다.
고아들은 함께 음악을 연주하고 서로를 위로하면서 전쟁의 상처를 보듬었다. 유 여사는 제주여중을 졸업한 뒤 1955년 11월 한국보육원이 제주시 전농로에서 서울휘경동으로 이전하면서 다른 고아들과 함께 제주를 떠났다. 서울대 기악과에 도전했다가 실패한 뒤 악기를 만져본 일이 없었다. 언론 보도를 접한 자녀들이 선물한 클라리넷을 다시 잡고 연습한 끝에 ‘매기의 추억’을 연주할 수 있었다. 그녀에게 제주도는 어린 시절 포근하게 감싸주었던 어머니의 따뜻한 품속과도 같은 존재다.
- 『섬,그 바람의 울림 제주국제관악제 25년 』 일부 발췌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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